생활 속에서

트럭을 타고 온 작업복 입은 천사...

방패연사랑 2010. 1. 15. 18:41

며칠 전, 밤 8시 넘은 퇴근길,

클러치가 가끔 헐거워지며 차가 조금 이상했습니다.

초보마냥 출발 시 시동이 꺼지기도 하고 울컥대기도 하고...

그러나, 그 늦은 시각에 문을 연 카센터도 없을테고

일단 퇴근이나 하고 보자는 생각으로 시내에 진입했는데

큰 길 사거리에서 결국 기어가 안 들어가 서고 말았습니다.

신호등 앞이라 비상등을 켰어도 차들이 계속 붙는 바람에

차 뒤에 서서 팔을 흔들어 고장났음을 알리고 있었는데

보험회사 통해 부른 긴급출동 견인차는 좀 늦겠다 하고

혼자 얼마나 짜증이 나고 팔도 아프고 또 얼마나 춥던지요.

그런데...

그 답답한 순간에 문득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근 이십 년 전, 객지 부산에서 직장 생활을 하던 시절,

서면로타리 주변이 지하철 공사로 엉망일 때 였지요.

소나기가 퍼 붓던 어느 날 밤,

편도 이차선으로 줄어든 로터리 부근 도로를 달리다가

순간 계기판에 불이 들어오며 시동이 꺼지고 말았습니다.

벨트가 나갔는지 아무리 시동을 걸러보려해도 되지 않고

갓길도 없어 차선을 열어줄 수도 없는 답답한 상황,

뒤에서 빵빵대는 차들에게 이번처럼 팔을 흔들어야 했지요.

차선 하나로 어렵게 빠져나가는 차들을 미안스레 바라보며,

퍼붓는 비에 머리부터 발까지 흠뻑 젖은 것도 모른 채...

 

요즘처럼 보험회사 긴급출동도, 핸드폰도 없던 시절이라

그저 발만 동동 구르며 경찰차라도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지나던 트럭이 창문을 내리며 뭐라고 소리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엄청 밀리는 곳이었으니 욕도 나올 만 했지요.

미안하다며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는데도 그냥 지나가지 않고

급기아  핸들을 틀어 내 차 앞을 막아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멱살이라도 잡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인가 하며 바라보니

가로등 불빛에 비친 이십대 낯선 얼굴이 차에서 내리고

공장 근로자로 보이는 허름한 작업복 차림인 그 젊은이는

비를 맞으며 급히 적재함에서 무언가를 꺼내고 있었습니다.

바로 와이어 밧줄이었지요.

 

그렇습니다. 그는 나에게 욕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안쓰러운 마음에 "차 끌어줄까요?" 소리를 쳤던 것이지요.

그 덕분에 내 차는 로터리 한적한 곳으로 옮겨질 수 있었고

급한 불을 꺼 준 데 대한 사례를 어찌할까 생각하고 있는데

나 처럼 머리 부터 발끝까지 온 몸이 흠뻑 젖은 그 사람,

숨 돌릴 새도 없이 다시 밧줄을 풀어 트럭 적재함에 싣고는

그만 가 보겠다는 눈짓을 보이며 트럭에 오르고 있었습니다.

뜻 밖의 도움에 경황이 없어 인사도 제대로 못 했는데

연락처도 모른 채 그냥 보낼 순 없어 급히 뛰어갔지요.

너무 고맙다고.... 사례라도 하고 싶다고...

바쁘면 다음에 만나 소주라도 한 잔 나누자고...

그러던 나에게 멋적은 웃음을 보이던 그가 남긴 한 마디... 

"언~지예....."

 

그리고, 이어진 내 말이 시작되기도 전에,

붕~소리와 함께 트럭은 범냇골 쪽으로 사라져 갔고

나는 빗 속에서 한 동안 멍청히 서 있어야 했습니다.

그가 사라진 방향을 자꾸만 바라보면서...

 

허름한 작업복에 트럭을 타고 온 그는 천사였습니다.

그 들은 부자도 좋은 옷이나 차를 타고 다지니도 않으면서

사람들에게 아직은 살 만한 세상임을 깨닫게 해 주지요.

세상엔 이렇게 날개를 감춘 아름다운 천사들이 적지 않은데,

 

나는 여지껏 한 번이라도 이름 없는 천사가 되어

낯선 이의 가슴에 기억되는 일을 해 본 적이 있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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